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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화교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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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문화연구원 부원장 정윤희 “ 바타비아 운하바닥이 시체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물에 젖지 않고도 건널수 있었다 ” [자료출처 ceknricek.com- 바타비아 화교학살 / 반 르우펜(Van Leupen) 그림의 한 부분1768 ] 250여년전의 화교 학살은 1740년 10월부터 벌어진 사건으로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그 주동자였다. 화교 10,000여명이 사망하고 VOC 군대 500여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 화교 학살의 배경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VOC는 자신들 손 아래의 동남아시아의 여러 무역 항구 중에 특히 바타비아의 개발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18세기 초 VOC는 광산과 고무,사탕 수수 농장 등에서 일 할 중국 노동자들을 바타비아로 대거 이주 시킨다. 이들 화교 노동자들은 바타비아 성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토착민들과는 다른 부지런함과 영특함으로 빠르게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 불법적으로 관여하면서 상권을 장악하고, 정치 계급 이외의 다양한 분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경제적 지배층이자 실질적 부유층으로 성장한다. 바타비아의 성 밖은 잘 사는 화교촌과 현지인 빈민촌으로 구분되어 도시 구조 자체가 변화되었다. 이에 대해 VOC의 계급층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화교수를 제한하려 했지만 화교들은 이미 그들끼리 똘똘 뭉쳐 영향력을 키운 상태라 쉽지 않았다. 1720년대 중반부터 바타비아에서 설탕이 과잉생산되기 시작하고 브라질과의 수출 경쟁으로 설탕 수출가격이 하락하고 거기에 커피 수출까지 빨간불이 켜지면서 많은 실직자들이 생겨난다. 설상가상 1730년대 말라리아 전염병으로 바타비아의 경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으면서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부정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된다. 1740년대에 들어서면서 설탕 가격은 1720년대의 반 가격까지 떨어지고 바타비아의 경제는 총체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만다. 당시 VOC의 바타비아 총독, 아드리안 발케니어(Adrian Valckenier 1737~1741-좌측사진)는 바타비아의 총체적 난국을 탈출할 방법으로 화교를 지목한다. 1740년 7월, 발케니어는 화교들에게 거주 허가 서류를 등록하도록 법을 정하고 거주증 없이 일하는 화교 노동자들을 찾아내 지금의 스리랑카인 실론(Ceylon)과 남아프리카의 다른 네덜란드 식민 농장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하 원문 참조)

출처 · www.indowe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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